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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01 / Day 1-10
시야가 열릴 때마다 또 다른 풍경을 보여주었다.
Day 2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어제 저녁부터 시작된 비가 아침까지 이어진다. 텐트를 때리는 빗소리에 눈을 떴지만, 몸이 나른해 도무지 일어나지질 않았다. 어깨부터 무릎까지 안 아픈 곳이 없다. AT에서 배운 것 중 하나가 '날씨로 불평하지 말자'는 것이었기에, 어제 국경에서 잠깐이나마 햇빛을 즐겼던 기억을 위안 삼아 몸을 일으켰다.
새삼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다. 왜 시작 전에 몸을 더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어차피 걷다 보면 몸은 알아서 만들어질 텐데, 종주 시작 전엔 먹고 싶은 거나 맘껏 먹자'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내가 참 어리석게 느껴졌다.
길 위에서 우리보다 하루 앞서가던 하이커를 만났는데 다리를 심하게 절뚝거리고 있었다. 첫날부터 32km를 걸으며 무리를 한 탓인 모양이다. 다음 마을에서 보호대를 사야겠다며 절규하는 그를 보며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종주(Thru-hiking)는 시합도, 경쟁도, 기록 경신도 아니다. 그저 본인 스스로의 속도에 맞추어 걷는 '나만의 하이킹'일 뿐이다. 이건 종주학 개론이 있다면 아마 첫 페이지, 첫 구절에 나올 만큼 뻔하지만 가장 중요한 진리다.
비는 하루 종일 오락가락하며 나를 괴롭혔다. 신발은 어제부터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워러소스(water source)의 물은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그 서늘한 감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겨우 캠프사이트에 도착했을 땐 몸에 으스스한 한기가 돌았다. 이건 100% 감기가 오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서둘러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가진 옷을 죄다 껴입으며 체온을 올리려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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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 실수로 다운자켓을 적셔버린 탓에 지금은 침낭을 이불처럼 두르고 앉아 일기를 적고 있다. 비상약으로 챙겨온 감기약을 털어 넣고, 스토브 없이 찬물에 미리 불려둔 라면이 먹기 좋게 퍼지기만을 기다리는 중이다. 몸은 춥고 발은 퉁퉁 부어오른 밤. 출발 전 집에서 마셨던 그 뜨거운 커피 한 잔이 유난히 생각나는 저녁이다.
나의 발이 되어준 신발
Day 4 찬란한 풍경과 가혹한 작별 사이에서
"Sunny day." 오늘 비로소 PCT의 진가를 보았다고 해야 할까.
물론 앞으로 이 길의 진면목이 계속해서 쏟아지겠지만, 오늘은 도저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만큼 풍경이 압도적이었다. 나는 계속 나아가야만 하는데,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것 같은 풍경들.
이런 내 마음을 누가 알 수 있을까.
걷는 내내 얼마나 많이 외쳤는지 모른다. 이 길 위에 서 있게 해줘 서 고맙다고, 내가 얼마나 행복하고 운이 좋은 사람인지 말이다. 만약 이 트레일을 만든 사람을 만난다면 진하게 안아주고 싶을 정도였다. 새파란 하늘에 걸린 하얀 구름들, 그리고 내 트레일 네임인 '솔라(Solar)'를 가득 충전시켜 주는 타오르는 태양. 그 아래 이어진 웅장한 산맥들은 숨을 멎게 하고 입을 벌어지게 했다.
하지만 그 감동은 '브러시 크리크(Brush Creek)' 직전까지만 허락되었 다. 마지막 4.6 km 구간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쓰러진 나무들을 봐왔지만, 이렇게 대책 없이 엉켜있는 광경은 처음이었다. 나무 밑을 기고, 넘고, 통나무 위를 위태롭게 걷으며 길을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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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작 1.6km를 이동하는 데 한 시간이나 걸렸으니 말이다.
트레일 위에서 안 좋은 소식을 들었다. 우리보다 하루 앞서 걷던 매튜라는 친구가 어제 눈길에서 미끄러져 100m 아래로 추락했다고 한다. 어깨뼈와 연골, 근육이 심하게 손상되어 병원으로 실려가 수술에 들어갔다는 소식이다. 매튜는 2012년 AT를 완주했던 베테랑 종주자였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아이젠조차 신지 않고 그 가파른 구간을 건넜다고 한다. 누구를 막론하고 방심과 자만은 산에서 가장 위험한 요소라는 것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깨달았다.
오랜 기간 종주를 준비하고 시작하자마자 부상으로 길을 떠나야 하는 그 마음을 어찌 말로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출발할 때 12명이었던 우리 그룹은 며칠 사이 6명으로 줄었다. 오늘 한 명이 무릎 부상으로 길을 내려갔고, 상태가 좋지 않은 친구를 동행하기 위해 또 한 명이 트레일을 떠났다. 그들이 언제 다시 합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부득이한 이별과 사고 또한 종주의 일부이겠지만, 나는 그저 내 방식대로 자연과 교감 하며 무사히 나아갈 수 있기를 수시로 기도할 뿐이다. 앞으로 3~4개월간 얼마나 많은 일이 벌어질까. 다시 한번 겸손하고 진지한 자세로 이 길에 임하겠다고 다짐해 본다.
무자비하게 쓰러진 나무들이 길을 가로막았다.
Day 6 첫 마을 스테헤킨, 고생 끝에 발견한 숨겨진 보물
공식적인 종주 6일 차. 종주를 위해 길을 나선 지는 벌써 8일째다. 오늘은 드디어 첫 마을에 들어가는 날이다. 지난 8일 동안 배터리를 아끼느라 핸드폰과 카메라를 조마조마하며 사용했는데, 막상 마을에 가까워지니 조금 더 적극적으로 영상을 찍어둘 걸 그랬나 하는 뒤늦은 후회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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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촬영 장비가 두 개라 번거롭긴 하지만, 나름대로 이 생활에 적응하려 애쓰는 중이다. 2시간 걷고 10분 휴식하는 나만의 리듬도 철저히 지키며 걷고 있다.
약 31km에 달하는 긴 내리막을 걸어 내려왔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길 양옆으로는 허리까지 오는 덤불들이 가득했다. 신발은 어김없이 젖어버렸고, 발바닥에는 네 개의 물집이 생길 조짐이 보였다. '다 신발 탓이야'라며 애꿎은 장비를 탓해본다. 마을에 도착하기 직전 마지막 3km 구간은 어찌나 돌이 많던지, 물집의 통증에 가랑이 쓸림까지 더해져 엉거주춤한 자세로 간신히 마을에 들어섰다.
그런데 내 눈앞에 나타난 이 마을, '스테헤킨(Stehekin)'. 오마이갓! 세상에 무슨 이런 곳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숨겨진 보물 같은 곳이었다. 외부로 연결된 도로가 없어 오직 배나 수상비행기로만 들어올 수 있는 오지 중의 오지. 아마 미국인 중에서도 이 마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 같은 PCT 종주자들은 트레일이 마을 옆을 스쳐 지나가기 때문에 이 비현실적인 공간을 방문하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 거친 숲과 바위 너덜길을 헤치고 온 끝에 마주한 이 평화로운 마을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걷지 않고 쉬어가는 '제로 데이(Zero Day)'를 가지기로 했다. 젖은 발과 장비를 말리고 고단한 몸을 뉘일 수 있는 이 짧은 사치, 이것이 다음 길을 이어갈 가장 큰 동력이 될 것임을 믿는다.
스테히킨의 저녁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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